강아지풀

더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여름날 도로 갓길.

얼굴에 한가득 씨앗을 품은 키 큰 강아지풀 하나가 작은 풀들 사이에서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휭” 소리 내며 지나갈 때 마다 흔들흔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강아지풀은 행복하기만 합니다. 얼굴에 품은 씨앗들만 생각하면 쨍쨍 내리쬐는 햇볕과 사나운 비바람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 중에도 뿌듯하게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약간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길 언덕에 반질반질한 머리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그어진 틈새는 마치 할아버지 얼굴에 주름살처럼 자글자글하고 너무나 긴 세월을 살아 나이도 모르는 민머리 바위가 있습니다.

민머리 바위에게 여름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민머리 바위는 밤새 듬뿍 내린 이슬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여름날 햇볕은 아주 못된 심보처럼 이슬을 금세 사라지게 하고 긴 낮 동안 민머리 바위를 달구어 저녁이 올 때까지 헐떡이게 했습니다.

석양이 유난히 아름다운 저녁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민머리 바위 위를 아주 조심스럽게 빙빙 돌더니 대뜸 “할아버지! 우리 친구 할래요.”라고 했습니다. 어리둥절한 민머리 바위는 “나하고!” “예! 나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럼 나는 좋지.” 민머리 바위는 친구가 생겨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민머리 바위는 외톨박이로 지냈습니다.

그날부터 고추잠자리는 저녁이면 민머리 바위에 와서 지친 날개를 접고 안전하고 편안한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이슬에 젖은 날개를 어떤 잠자리보다 햇볕에 빨리 말리곤 말없이 날아가곤 했습니다. 또 비가 오는 날이면 민머리 바위 아래서 비를 피하기도 했지만 민머리 바위에게 한 번도 고맙다고 한 적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추잠자리는 민머리 바위에게 정겨운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이 오자 강아지풀의 가는 목은 씨앗이 여물수록 점점 휘어져 갔습니다.

늦은 오후 고추잠자리 하나가 강아지풀 얼굴에 냅다 내려앉았습니다.
강아지풀 몸이 기우뚱 땅에 닿을 것만 같았습니다.
깜짝 놀란 강아지풀은

“너. 내 목이 꺾여 부러지려고 하는 것 안 보여?”

강아지풀은 어이가 없어 소리쳤습니다.

“미안!”

고추잠자리는 건성으로 한 마디 하고는 잽싸게 씨앗 하나를 물고는 부리나케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니! 내 씨앗을 왜 가져가?’

강아지풀은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눈물만 글썽일 뿐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고추잠자리는 배짱 좋게 매일 매일 같은 시간에 강아지풀에게 와 씨앗 하나씩 물고 가 버렸습니다.

‘어쩌면 좋아! 소중한 내 씨앗들을 다 가져가려고 하네.’

애간장이 타는 강아지풀은 고추잠자리에게 씨앗을 다 잃어버릴 것 같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도 고추잠자리는 강아지풀의 아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와 씨앗 절반이나 가져가더니 갑자기 오질 않았습니다.

‘휴… 감사! 감사! 합니다.’

강아지풀은 자신도 모르게 감사하면서도 고추잠자리가 가져간 소중한 씨앗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마음은 절절이 쓰리고 아팠습니다.

고추잠자리는 저녁이 되어도 민머리 바위에 오지 않았습니다.

‘고추잠자리 친구가 왜 안 오지? 나 보다 더 좋은 친구가 생겼나? 아니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민머리 바위는 걱정을 하면서 고추잠자리를 기다렸지만 고추잠자리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면 인사는 하고 가야지.’

민머리 바위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어느 늦가을날 밤.
고추잠자리에게 씨앗 절반을 잃어버린 강아지풀은 남은 건강한 씨앗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혼신을 다해 몸을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속이 꽉 찬 씨앗들이 시원한 가을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훨훨 날아갔습니다. 한꺼번에 헤어져야 하는 아픔은 있었지만 강아지풀은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 사랑하는 내 씨앗들아. 어느 곳에 가던지 잘 자라 모두에게 기쁨이 되어 주렴.”

어느새 가을이 지나가고 밤이면 촉촉한 이슬 대신 찬 서리 내리는 겨울이 왔습니다. 강추위에 바싹 마른 강아지풀은 칼바람에 바스러지더니 훨훨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민머리 바위는 새 봄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긴 겨울잠을 잡니다.

언제나 그랬듯 영원 할 것 같았던 추운 겨울도 지나가고 다시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고 난 후 햇살 가득 봄날의 따스함이 온 누리를 감싸자 민머리 바위 갈라진 틈새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간질간질함이 이어졌습니다. 민머리 바위는 부르르 떨며 ‘내 몸이 이상해지네. 왜! 이러지?’ 신기해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연한 새싹들이 틈새에서 “휴” 하고 숨을 크게 쉬며 얼굴을 쑥쑥 내밀 때마다 몸이 간질거렸습니다.

‘에계계! 너희들이 내 몸을 이상하게 하고 있구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풋내 나는 새싹들이 한 목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아이 깜짝이야. 너희들 누구니?”
“놀라셨죠. 할아버지! 우리는 강아지풀입니다.”
“어쩌다 너희들이 여기에?”
“작년 가을 고추잠자리가 우리가 씨앗일 때 여기에 데려왔어요.”
“고추잠자리가! 왜! 그랬을까? 여기선 자랄 수가 없는데. ”

민머리 바위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할아버지! 걱정 하지마세요. 여기에는 바람이 실어다 준 흙이 있고 밤에 내리는 이슬이 있어 우리는 자랄 수 있어요.”

민머리 바위는 보기 싫게 자글자글 갈라진 틈새에 흙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가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타고 와 있다 비가 오면 씻겨 가고 남은 흙과 해가 뜨면 금방 사라지는 이슬만 있는 틈새에서 씨앗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민머리 바위 머리에 어지럽게 그어진 틈새를 따라 뿌리 내린 강아지풀 꼬맹이 새싹들은 토닥토닥 다투기도 했지만 잘 자라 민머리 바위가 여름날 겪는 아픔을 더 이상 겪지 않도록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맙구나. 너희들이 나에게 고통이 아닌 상쾌한 아침을 선물로 주었어.”

그 때 어디선가 유난히 빨간 아기 고추잠자리들이 날아와 민머리 바위 위를 민첩하게 돌다 날아갔습니다.

‘너희들 고추잠자리 아가들이구나.’

민머리 바위는 알 수 있었습니다.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친구 고추잠자리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민머리 바위는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말없이 떠나버린 고추잠자리가 자기의 아픔을 알고 그늘을 만들어 준 진정한 친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머리 바위는 솟구치는 울컥함을 참을 수 없어 하늘을 보며

‘고맙다. 친구야!’ 하고 외쳤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빨간 아기 고추잠자리들이 민머리 바위에 찾아와 강아지풀 위에 앉아 ‘새록새록’ 잠을 잡니다. 깊어가는 밤 별들이 어둠을 밝히자 이슬은 소리 없이 별빛 반짝임을 담고 내려 와 아침을 기다리는 강아지풀 잎에 작은 물방울 진주를 매달아 주었습니다.


코멘트

“강아지풀” 에 하나의 답글

  1. 오래도록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여운이 남는 동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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